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쿠자와 유키치 (문단 편집) === 민중 경멸론자 === 젊은 시절 민중 계몽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민중을 비판하고 천시했다. 그는 사상가로서의 명망과는 달리 원칙없는 언행을 일삼았는데 예를 들어, 그는 초기에 쓴 『학문의 권장』에서 인간 평등 사상을 내보이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이것을 부정'''한다. 물론 사상가가 사상이 원고부동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는 변화한 후가 너무 [[막장]]이라는 게 문제. 특히 교육 문제에 대하여 그의 입장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자면, 학문의 권유 → 강박 교육론(강제 의무 교육론) → 강박 교육 반대론 → 최하등 교육론(3년제 간이 소학교 용인) → 신 학문의 권유 → '''공장 노동 아동에 대한 교육 거부''' 변천한 내용을 보면 단순히 원칙이 없는 것을 떠나서, 과연 교육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악질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막부]] 정치를 그리워하는 당시 시골 사람들을 보며 우매한 대중이라고 경멸했다. 물론 계몽 사상가 입장에선 이런 사람들이 답답한 우민들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후쿠자와는 이들을 계몽할 생각보단 걍 우민이라고 멸시하기 바빴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농사꾼과 수레꾼의 논의를 한쪽에 두고 정부권력의 균형을 잡으려는 것은 제등을 저울추 삼아 범종의 무게를 다는 것과 같다. 농사꾼과 수레꾼에게 학문을 가르쳐서 그들에게 기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은 삼나무 묘목을 심어놓고 돛대를 구하는 것과 같다. 터무니없는 바람이지 않은가."- 1875년 6월./ "홋카이도의 토착민 자제를 양육하고 이들에게 학문을 배우게 하여 고생고생 가르쳐도 유전의 지덕이 부족하다. 호농, 부농, 양가의 자제는 이미 유전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 1882년 3월. 가난한 저소득층은 원래 무식한 자들이므로 애써 가르쳐봐야 헛일이라는 말이다. 덧붙여 인간은 빈부의 격차에 따라 그 유전자를 물려받는다는 기상천외한 유전학까지 제시.] 이것은 그의 또다른 특징인 '''우민 멸시'''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초창기의 개혁적 성향과 달리 흑화된 이후 후쿠자와는 우민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사상으로 변화해갔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천황]]제의 본질이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하는 사술'''임을 알고, 그것을 지적하긴커녕 '''적극적으로 선택'''하였다. 또한 그는 초기에는 천부인권의 인간 평등을 주창하다가 나중에는 대중을 바보 같은 구제 불능의 우민 집단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종교]]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를 이용해 백성을 통제하고자 한 논리는 이후 '''[[국가신토]]'''라는 우상숭배로 나타나게 된다. 후쿠자와는 [[종교]]는 허황된 미신,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종교를 비판했다. 그런데 그는 우매한 사람들을 통제하는데는 종교가 최고라는 역설을 하였다. >'''"세상에 병신들이 있는 한 종교 또한 매우 유용하다. 바보와 병신에게 종교는 꼭 맞는 구색이 아니랴."'''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 민권 운동 당시 이 운동을 "잡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하던 메이지 정부를 옹호했다는 점을 보면 곡학아세라고 볼 수도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 민권 운동을 두고 "너무 쓸데없이 시끄럽게 군다."라고 조롱하는 만평을 신문에 싣기도 하는 등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정부가 세금을 내라고 명령하면 민중은 아무런 불만없이 고분고분 세금을 내는 것이 의무."라면서 국민의 절대 복종을 정당화했다. 아울러 후쿠자와 유키치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사회주의와 같은 서구의 민중 운동이 일본의 서민들에게 전해질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한 자가 지혜를 갖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이 왜 가난한 지에 대해서 알게 되면, 차티스트 운동이나 사회주의 같이 권리를 달라고 시위를 하면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근대화와 인권을 설파했던 사람이면서도 정작 하층민의 인권 이슈에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30만 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해외에 성노예로 팔려갔던 [[가라유키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가라유키상을 두고 "매춘부의 해외 진출은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되며, 자유롭게 하는 것이 경세상 필요하다(1896년 1월 18일)"라고 긍정했다. 그의 우민 멸시는 [[일본]] 국민들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근대화되지 못했다고 간주된 [[조선]], [[청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 조선과 청의 민중들을 경멸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인 독립당의 처참한 최후는 그의 민중 경멸을 합리화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민중을 경멸했고, 스스로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였음에도 바보와 병신을 위한 종교 진흥론을 1백편 이상 집필하였다. 그 밖에도 '타인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거나, 고소해하는 속이 배배 꼬인 인간'들은 의외로 사회에 많다, 그런 속이 배배 꼬인 사람들의 심리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몰라도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라는 사디스틱한 말도 남겼다.[* 비슷하게 속이 배배 꼬인 중국의 [[루쉰]]과 비교할 때, 당대의 제국주의 하에서 ‘나쁜 놈이 잘나가는’ 현실에 대해 루쉰의 경우 ‘패자’로 나타난 자국에 대한 혐오를 보였다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 ‘패자로 있는 것보단 더러워도 그나마 승자로 있는 것이 낫다’는 식의 결론하에 그 ‘더럽고 치사함’에 대해 냉소적 긍정을 보인 것으로 추론해볼 여지도 있다. 물론 속마음은 본인만 알 일이다.] 그는 당시 일본인들이 [[신사(신토)|신사]]에 가서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을 어리석고 미개한 짓이라며 조롱했다. 그럴 시간에 노동을 더 해서 돈을 더 벌거나, 기술을 연마하는게 더 본인에게 도움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 천년간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인들의 습관, 힘들고 어려울 때 점술이나 종교에 의탁하는 버릇을 쉽게 고칠 수는 없었다. 동시대의 일본인 중에는 그를 [[비국민|비애국자]]라고 비판하거나 그가 일본을 '''강도(强盜)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의견들도 있었다. 참고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사회에 [[기독교]]를 보급하는 일도 반대했다. 자신의 글에서 "'''예수교의 교의 따위는 엿 먹어라.'''"고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조롱하기도 했는데, 이유는 일본인들이 기독교를 믿으면 기독교를 믿는 서양 나라들을 형제라고 여길테니, 장차 그들과 전쟁을 하는 일을 주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과[* 다만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면 유키치의 쓸데없는 걱정인게, 기독교 국가인 독일 제국, 나치 독일은 1, 2차 세계 대전에서 같은 기독교를 믿고 인종이나 문화도 비슷한 서구 국가들인 미국, 영국, 프랑스와 잘만 싸웠다. 거기다 유럽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독교 국가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끼리도 서로 싸워댔던 역사가 수두룩하다. 물론 개중엔 반전주의자들도 있을테니 연대할 싹조차 잘라내야 된다는 후덜덜한 의미면 할 말 없다만.] 사랑과 평화를 내세운 기독교의 교리가 제국주의를 긍정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우습게 여겨진 탓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그가 무신론자였다는 점과 자유주의적 사상을 감안했을때 종교적 권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반교권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포함한 당대 일본의 상당수 이른바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대중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지식인이 다수의 대중을 이끌고 지도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하고 절제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후쿠자와 자신은 민권과 입헌을 제창하기는 하지만 특정 체제를 문명 등급과 연계하지는 않았는데, "군주정치가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으며 공화 정치도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 명분이 어떠한가를 막론하고 다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그러니 한 방식의 체제가 어떠한지만 보고 문명의 실질을 판단할 순 없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공화 정치 얘기 잘못했다간 암살당할 수도 있는 당시 일본의 시대 분위기도 감안해야할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